1919년 3월 1일. 107년 전 그 날.

1919년 탑골공원 만세시위
1919년 탑골공원 만세시위 ㅣ 출처: 위키피디아

오후 2시, 서울 종로 인사동의 한 요릿집 태화관.

민족대표 33인이 조용히 모였다.

탑골공원에서 열기로 했던 독립선언식을 일본 경찰과의 충돌을 우려해 이곳으로 옮긴 것이었다.

한용운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리고 만세 삼창 후, 그들은 스스로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었다.

“우리가 여기 있으니 데려가라.”

같은 시각, 탑골공원에는 학생과 시민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민족대표들이 잡혀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한 청년이 품 속에서 독립선언서를 꺼내 낭독하기 시작했다.

낭독이 끝나는 순간, 수천 명의 함성이 하늘을 찔렀다.

대한 독립 만세.

그날 하루, 서울뿐 아니라 평양, 진남포, 원산, 선천 등
4개 도 7개 도시에서 동시에 만세 시위가 터졌다.

이후 수개월간 전국 농촌까지 번져나간 이 운동에는 20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당시 조선 인구 약 2천만 명 중 10%였다.

일제는 총칼로 진압했다.
조선총독부 공식 기록만으로도 사망자 7,509명, 구속자 4만 7천 명이었다.


그런데, 1919년 세계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3·1운동이 일어나던 그 시기,
파리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위한 강화회의가 한창이었다.

미국 대통령 윌슨이 “약소민족의 자결”을 주창했고,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은 그 말에 희망을 걸었다.

김규식이 파리로 파견됐다.
하지만 강화회의장 문은 굳게 닫혔다.

“정부 대표가 아니면 참석할 수 없다”는 이유로.

같은 자리, 같은 문 앞에 서 있던 또 다른 청년이 있었다.

훗날 베트남을 이끌게 될 호찌민이었다.

그 역시 베트남 독립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들고 왔다가 복도에서 쫓겨났다.

강대국들의 “민족 자결”은 식민지 민족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말이었다.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조선대표단
파리강화회의에 파견된 조선대표단 (1919) ㅣ 출처: 몽양여운형아카이브 / 국립중앙도서관

역사는 이렇게 반복된다.

107년이 지난 지금, 우리는 3월 1일을 공휴일로 쉰다.
하지만 그날 태화관에서 스스로 체포를 자청하며 독립을 선언한 이들을,
탑골공원에서 목 놓아 만세를 불렀던 이름 모를 수천 명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까.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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