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3월, 재계 26위 삼미그룹이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당시 김영삼 정부 여당은 말했다. “경제 펀더멘털은 튼튼하다.” 삼미가 쓰러진 그 자리에서, 한보와 기아가 차례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해 12월, 대한민국은 IMF 앞에 무릎을 꿇었다. 실업자가 거리로 쏟아졌고, 금 모으기 줄이 은행 앞에 늘어섰다.
29년이 지났다.
2026년 3월, 원·달러 환율이 1,517원을 기록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고강도 관세 정책과 글로벌 달러 강세가 겹치며 신흥국 통화 전반이 압박을 받는 흐름 속에서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정점(1,570원대)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기억을 조금 되감아보면, 이재명 대통령은 야당 대표이던 2022년 환율 1,400원 돌파 당시 “외환위기 수준의 심각한 상황”이라고 했다. 2024년 4월 같은 수준의 환율에서는 “국가 경제 전반의 위기가 현실화됐다”, “총체적 위기”라는 말을 썼다.
그리고 2026년 1월, 청와대 안에서 그는 말했다. “한두 달이면 1,400원 전후로 내려갈 것이다.”
환율은 내려가지 않았다. 1,500원을 넘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위선이라 부르고, 어떤 사람들은 야당과 여당의 책임 구조가 다르다고 말한다. 둘 다 틀린 말은 아닐 수 있다. 집권 전과 후에 경제를 바라보는 시야가 달라지는 일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있었다.
다만 숫자는 그런 맥락을 모른다.
1,400원일 때 “외환위기 수준”이었다면, 1,517원일 때 그 언어는 어디로 갔는가. 언론이 “같은 환율, 다른 잣대”라고 적는 것은 정치 공세가 아니라 수치의 대조다.
1997년 삼미그룹 붕괴는 그해 한보, 기아까지 이어지는 도미노의 첫 패였다. 위기의 징조는 늘 사소해 보이는 것에서 시작됐고, 그것을 외면하는 말들은 항상 비슷한 형태를 띠었다. “펀더멘털은 튼튼하다.” “곧 안정될 것이다.”
역사가 가르쳐주는 것이 하나 있다면, 위기를 부르는 것은 종종 위기 자체가 아니라 위기를 인정하지 않는 언어라는 점이다.
오늘도, 기록한다.